제2차 세계 대전 승전 - 소련의 기여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소련의 기여-]
서울주재 로씨야련방 대사관
https://korea-seoul.mid.ru
2024년 4월 8일
[ 원 문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소련의 기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지도 어느 덧 79년이 흘렀다. 그 동안 벌써 몇 세대가 교체되었고, 전 세계의 정치 지형이 바뀌었다. 나치즘에 맞서 장엄하고도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하며 전 세계를 구원했던 소련은 더 이상 지도상에 없다. 뿐만 아니라2차 대전이라는 전쟁 자체도 그 참전국에서조차 아득한 추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가 요구하는 우리의 의무는 앞으로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즘에 대항해 승리하기까지 소련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 영웅적인 전쟁의 전후방에서 손을 맞잡고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함께 싸웠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전수하는 데 있어 사상화, 정치화 된 추측들을 배제하고 철저히 고문서와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기초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은 갑자기 벌어진 전쟁이 아니었고, 모두가 대비하고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나치군의 공격은 역사상 전례없이 파괴적이고 강력했다. 1941년 6월 22일 소련은 사실상 전 유럽의 산업, 경제, 군사 역량이 집적된 군대, 특별히 전쟁을 위해 동원되어 매우 잘 단련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맞닥뜨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무장한 냉혹한 침략자들에 맞서 평화로운 일상과 계획 그리고 모든 소망을 처참하게 짓밟고 뭉개 버린 적을 응징하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단결한 소련 사회의 거대한 힘이 일어났다.

나치군을 격파하기까지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나라는 단연 소련, 바로 그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오늘날 이 사실을 어떻게든 뒤집어보려는 각종 시도가 난무하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붉은 군대야말로 벨로스토크, 모길료프, 우만, 키예프, 뱌지마, 하리코프 포위전에서 마지막까지 전투에 임한 영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과 오데사, 쿠르스크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도 맹공을 펼쳤다. 그렇게 소련군은 바르샤바, 벨그라드, 빈, 프라하를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켰고, 쾨니히스베르크와 베를린도 단숨에 장악했다.

독일 전쟁배상위원회가 1945년 2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독일군이 소련 전선에 소모한 병사수는 타 전선보다 적어도 10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련 전선에 독일 전차의 5분의 4, 독일 전투기의 3분의 2가 투입되었다». 다시 말해, 반히틀러 연합군이 보유한 군사역량의 75%가 소련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과 그 연맹군 전력 중 626개 사단을 '가루로 만들었는데', 그 중 독일군 전력은 총 508개 사단에 달했다.

소련-독일 전선은 광범위한 크기를 자랑했다. 총 연장길이로 보았을 때(1941년에는 약 4000 km, 1942년에는 6000 km 이상), 소-독 전선은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 서부 전선의 총 연장길이를 4배나 뛰어 넘었다. 소-독 전선이 유지되었던 1418일 동안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날은 총 1320일이었던 반면, 이탈리아 전선의 경우 총 663일 중 492일, 서부 전선의 경우는 총 338일 중 293일, 북아프리카 전선의 경우 973일 중 309일이었다.

1942년 4월 28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국민연설에서 «우리의 공통의 적에 대항하여 반히틀러 연합군에 속한 25개 국가가 격파한 것 보다 소련군이 격파한 독일의 군사, 전투기, 전차, 대포 수가 훨씬 더 많다»고 언급했다. 1944년 9월 27일 처칠 수상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는 «러시아군이 독일이란 전쟁기계의 모든 내장까지 끄집어냈다»고 언급되어 있다. 독일군이 입은 총 피해의 73%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발생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승전하기까지 소련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독일군 군사장비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는데, 일례로 전체 전차 및 돌격포 손실규모의 75%, 전체 전투기 손실규모의 75% 이상, 전체 대포 손실규모의 74%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발생했다. 소-독 전선에서 거둔 소련 붉은 군대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1944년 6월 6일 실시된 노르망디 «오버로드» 작전을 시작으로 유럽의 제2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약 2600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 중 군인은 12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520만 명은 전사했고, 510만명은 실종되었거나 포로로 잡혀갔으며, 170만명은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망했거나 사고사를 당했다. 또한 총 1370만 명의 양민들이 희생당했는데, 이 중 740만 명은 적군의 점령지에서 의도적으로 사살되었고, 410만명은 점령체제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220만 명은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나치군이 장악했던 유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폴란드 - 410만 명, 유고슬라비아 – 170만 명, 그리스 - 45만 명, 네덜란드 - 21만명, 벨기에 - 8만 8천 명을 기록했다. 반히틀러 연합군의 주요 국가에서 발생한 전사자 수는 다음과 같다: 미국 – 40만 명, 영국 – 37만 명, 프랑스 - 60만명이다. 중국은 일본과 치른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3500만 명을 잃었다.

히틀러군은 점령지의 모든 자산을 초토화시켰다. 산업, 도시, 교통로, 문화유적과 중심지가 히틀러군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유럽만 보더라도 2360만 개의 주택이 파괴되고, 1450만 개의 공공건물과 산업시설, 20만 km 이상의 철도가 붕괴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련이 가장 큰 물질적 손해를 입었다. 약 2500만 명이 집을 잃었고, 1710개의 도시와 마을, 7만 개 이상의 촌락이 사라졌으며, 600만 개 이상의 건물과 3만 2천 개의 크고 작은 산업시설, 4000개의 철도역사, 6만 3 천 km에 달하는 철도, 2000개의 교량과 기타 시설물들이 파괴되었다. 농업부문의 타격도 매우 심각했다. 10만 개의 콜호즈와 2000개의 소브호즈, 3000개의 중장비 및 트랙터 차고지가 파괴되었다. 이로써 소련이 입은 총 물적 피해액은 2.5조 루블에 달했고, 비율로 따지면 국가 자산의 30%가 사라진 셈이었다. 점령지였던 지역의 피해규모는 3분의 2에 달했다. 이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GDP 성장률이 70%였던 미국과 사뭇 비교되는 결과인 것이다.

물론, 공공의 적과 맞서 싸운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힘이 있었기에 우리는 승전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조국에 대한 침공을 막고 독일과 그 연맹국들에 맞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다. 미국과 영국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제2전선을 열었다. 미군은 태평양 지역에서 침략자들에 대항해 강력하고 파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 맞서 싸운 중국 민족의 수많은 희생과 혁혁한 공을 우리 모두는 또한 기억하고 있다. 또한 치욕스러운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나치군과 끝까지 싸웠던 «자유 프랑스»의 군대도 잊지 않을 것이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많은 나라와 민족을 해방시키는데도 막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중부 및 남동 유럽 국가들의 해방에 있어 큰 역할을 했다. 약 7백만 명의 소련군이 유럽의 11개국 해방전에 직접 참전했다.

소련군은 연합국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항상 연합국에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일례로, 벨로루시에서 전개되었던 대규모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붉은 군대는 미군과 영국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지원했다. 1945년 1월 오데르 강 유역을 뚫고 진격한 소련군은 서부전선의 아르덴에서 강력했던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를 저지했다.

독일이 패전한 지 3개월 후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대일전을 포고했다. 8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한반도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25군과 태평양 함대는 8월 15일 경 사실상 38선까지의 영토를 모두 해방시켰다.

서구 연합국가들은 소련의 도움 없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했는데, 당시 미국의 예상에 따르면 대일전은 소련의 도움이 없을 경우 1947년 또는 1950년까지 길어질 수도 있었다. 가장 막강하고 전투력이 높았던 일본지상연합군을 소련군이11일 만에 전격 격파한 사례는 2차 대전사 뿐 아니라 전체 전쟁역사에서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일전에서 입은 소련군의 총 인명피해는 군사 약 4500명이었고, 이 중 전사자 수는 1500명이었다. 특히 한반도 해방전에는 소련군을 제외하고는 미군을 비롯해 그 어떤 나라의 군대도 참전한 바가 없다. 한반도 땅에 미군이 처음으로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8일로 일본이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한 이후였다.

소련은 나치군 후방에서 전투를 벌였던 동유럽 국가에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은 폴란드 군에 약 70만 정의 소총과 자동소총, 1만 5천 개의 기관총과 박격포, 약 3500개의 무기, 1000대 의 전차, 1200기의 전투기, 약 1만8천 대 이상의 자동차 그리고 많은 양의 폭약 및 연료를 지원했다. 1944년 - 1945년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으로부터 9만 6500 정의 소총과 기병총, 7만 정의 수동 기관총, 고정식 기관총, 자동소총, 3364문의 박격포, 약 1000문 이상의 대포, 약 500기 이상의 전투기, 1329개의 무전기와 기타 군장비를 지원받았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에 맞섰던 많은 나라들이 동일한 지원을 받았다.

그 밖에도 소련이 해방된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기근을 해소하고 경제와 인프라를 복구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엄청난 물질적 원조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련은 브레스트에서 모스크바와 볼가에 이르기까지 수 천 킬로미터에 걸쳐 잿더미만 가득했던 그 시절에도 다른 국가에 대한 원조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45년 5월 오스트리아 정부는 «추수기가 올 때까지 향후 7주 동안 국민들에게 보급할 식량이 없다»며 소련정부에 식량원조를 요청하였다. 소련 지도부의 식량원조 결정을 두고 당시 오스트리아 임시정부의 K.레너 총리는 «구원의 행위»라고 칭하면서 «오스트리아인들은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붉은 군대가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이 운영했던 강제수용소를 해방시키는데 기여한 점도 별도의 언급이 필요한 사안이다. 강제수용소는 가스실, 화장터, 불법 의학실험실 등을 갖추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시설이었다. 일례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는 1일 기준 3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트레블린카 – 2만 5천명, 소비보 – 2만 2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소련,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출신 1800만명이 강제수용소 등을 거쳐갔고, 그 중 11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1944년 7월 폴란드의 루블린 시 인근에 위치한 나치군의 마이다네크 대형수용소에 소련군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예상치 못한 적군의 빠른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나치군은 대량 살상에 대한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소를 파괴했다. 수용소 직원들은 수감자들의 시체를 태우는 용도였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장터를 불태웠지만 서둘러 철수하는 과정에서 가스실은 미처 파괴하지 못했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은 벨제크, 소비보, 트레블린카 강제수용소가 위치했던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 그 이후 몇 개월 동안 소련군은 추가적으로 발틱해 인근 지역과 폴란드 지역에 위치했던 몇 개의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또한 독일군의 항복이 있기 얼마 전 소련군은 슈트트호프,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를 해방시켰다.

1945년 1월 27일 붉은 군대는 폴란드 오슈비엥침 시에 위치했던 가장 큰 규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을 열었다. 당시 전투를 벌이며 수용소로 진입했던A.P.샤피로 대대장의 회상에 따르면 «수용소 내 공기는 잿가루와 불에 탄 인육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기가 되어 화장터 굴뚝으로 나오는 방법뿐이었다». 제107 소총사단의 작전에 지휘관으로 참여했던 V.Y.페트렌코 대령은 «오슈비엥침에 도착한 당일 집계한 수는 7500명이었다. 독일군은 노약자만을 남겨 두었고, 나머지 수감자들은 쫓아냈다. 우리가 수용소에 가까워졌을 때는 걸을 수 있던 자들이 이미 잔학한 고문자들로부터 도망간 후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줄무늬 옷을 입은 기진맥진한 사람들만이 각자 서로 다른 언어로 말을 걸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살아있는 송장이었다. 오슈비엥침에서 나는 여자들이 거주했던 막사를 보았다. 바닥에는 피와 배설물이 넘쳐났고, 시체가 있었으며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나였지만 그 막사에서 5분을 머물기가 힘들었다. 나는 가스실에도 가 보았다. 가스실 바로 옆에 화장터로 나가는 입구가 있었다. 그 후에 나는 먹지 못해 배가 부풀어 오른 아이들이 나무막대기 같은 손과 발을 하고 불안한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거대했는데, 나머지 신체 부위는 억지로 꿰매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눈을 닦아내려 했지만, 아이들의 눈은 말라 있었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던 것이다. 전쟁을 통틀어 이보다 더한 충격적인 장면은 보지 못했다…»

1943년 10월 30일 소련, 미국, 영국이 히틀러군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채택한 모스크바 선언문과 1945년 8월 8일 소련, 미국, 연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반히틀러 전선을 구축했던 19개 국가들이 서명한 런던 협정에 근거하여 국제군사재판소인 뉘른베르크재판 법정에서 나치전범들에 대한 법의 심판이 이뤄졌다. 하지만 국제군사재판소에 나치전범들을 세우기까지 소련의 이니셔티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가 이미 1942년 10월 14일에 «히틀러 침략군와 그 동조자들이 유럽 점령지에서 벌인 잔학행위에 대한 책임»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게다가1942년 11월 2일 설립된 비상국가위원회가 나치전범들의 잔학행위를 증명하는 문서와 정보의 수집, 검증, 체계화 등의 작업을 수행하면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소련과 폴란드 영토에서 자행되었던 잔학행위에 대한 27 건의 문서를 공개했고, 뉘른베르크재판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증인심문에 대한 총 25만 개 이상의 의사록을 수집했다.

독일에 의한 침략전쟁 발발, 국가사상으로 선택된 대량학살론, '죽음의 공장'에서 대량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개발되고 공급되었던 기술, 전쟁포로에 대한 반인륜적 행위와 살상 등의 내용이 전세계인들에게 알려졌고, 이후 이에 대한 합당한 법적 책임을 물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뉘른베르크재판은 세계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를 적대시하며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될 수 있었다. 국제군사재판소의 문서들은 전후 국제관계 시스템의 기본적인 법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쓰였다.

약 1년 동안 활약했던 국제군사재판소는 방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총 403회의 공개재판이 있었고, 116명의 증인 심문, 30만 건에 달하는 서면 증거 그리고 사진과 영화필름(대부분 독일 정부부처,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작전본부, 방산기업과 은행의 공식 문서와 개인 소장 자료들)에 대한 기소 내용을 담은 총 3000건의 문건을 검토했다. 만약 독일이 승전을 했다면 또는 전쟁 종식이 빠르고 파괴적인 속도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이 문건들(대부분 '기밀문서' 직인이 찍혀 있었음) 대부분은 아마도 파기되어 전세계인들은 영원히 그 존재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갈색의 흑사병'으로부터 벗어나 국제군사재판소의 판결을 두 손 들고 환영했던 인류는 오늘날 각종 변형된 형태로 부활하는 나치즘을 목도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친위대와 함께 범죄집단으로 규정된 무장친위대 부대원들을 영웅화하고 칭송하는 세력들이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을 틀렸다. 우리는 이미 히틀러의 신화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라고 했던 나치전범 중 한 명인 한스 프리츠셰의 이 말이 우리 세대에서 실현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유엔 총회가 승인한 (1946년 12월 11과 1947년 11월 27일 결의안) 뉘른베르크 원칙은 모두가 인정하는 국제법의 기준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은 범죄 명령의 이행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며, 평화와 인류에 대한 범죄를 도모하는 국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가 되기도 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독일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연합국들이 전후세계에서도 함께 평화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943년 7월 28일 («노변정담») 연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 원수의 지도 하에 러시아 민족은 이전까지 세계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애국심, 강한 정신력 그리고 헌신의 예시를 선보였다. 전쟁이 종식된 후에도 우리 나라는 나치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은 물론 전 세계를 구원하는데 이바지했던 국민들의 나라, 러시아와 선린관계 및 진정한 우정을 기꺼이 유지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강대국인 승전국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오늘날의 체제는 수 세기에 걸쳐 인류가 모색했던 지적, 정치적 탐구의 정수로 자리잡았다. 테헤란회담, 얄타회담, 샌프란시스코회담, 포츠담회담 등 일련의 회의들은 첨예한 대립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75년간 세계대전이 재발하지 않을 수 있었던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2차 대전 승전국인 강대국들의 지도자들은 물론 정치적 책무를 맡고 있는 모두는 이 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 및 개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그것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전쟁을 일으킨 진정한 범죄자들, 세계를 지배하고 파시즘이 장악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파시즘 지도자들의 망측한 음모를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지우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역사가 준 교훈의 망각은 결국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서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을 옹호하고 2차 대전의 여러 사건을 정직하게 편견 없이 전파하는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소련의 기여-]
서울주재 로씨야련방 대사관
https://korea-seoul.mid.ru
2024년 4월 8일
[ 원 문 ]
주인으로 삽시다 !
우리 스스로와 사랑하는 후세대를 위하여 !
사람(人) 민족 조국을 위하여 !!



《조로공동선언 : 2000년 7월 19일 평양》
반제자주 다극세계 창설 - 공정하고 합리적인 국제질서 수립



>> 조선 땅을 점령함 : 점령자(침략자) 미제국 맥아더 포고령

>> 한국인 마루타 : 주한미군 세균전 실체

>> 강제 백신(예방) 접종 : 강제 인구감축 대량학살 무기

>> 끊임없이 전쟁을 부추기는 피아트 머니 - 사기.착취.략탈.강탈 도구

>> 현금금지(캐시리스) 전자화폐(CBDC 씨비디씨) 특별인출권(에스디알)

>> 미국 달러 몰락, IMF SDR 특별인출권 국제기축통화 부상과 금

>> 딮 스테이트 : 그레이트리셋, 유엔 아젠다 2030, 2021, SDG 17, 아이디 2020, 4차산업혁명, 세계경제포럼, 세계화, 신세계질서, 세계단일정부, 세계재편



민족자주 승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한미동맹파기! 미군철거!!

주권主權을 제 손에 틀어쥐고, 주인主人으로서 당당하고 재미나게 사는 땅을 만들어, 우리 후세대에게 물려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