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씨야대사관] 2023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한 칼럼에 대한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의견 20230704
[로씨야련방대사관] 2023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한 칼럼에 대한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의견
2023년 7월 4일
[ 본 글 ]
2023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한 칼럼에 대한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의견
《2023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 칼럼 «'8월의 폭풍' 그리고 소련군의 두 얼굴»에 관하여》
2023년 5월 27일 조선일보에는 1945년 8월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대일본전 승리에서 소련의 역할을 폄훼하기 위한 수많은 역사적 미신을 반복하는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의 칼럼 «'8월의 폭풍' 그리고 소련군의 두 얼굴»이 게재되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논평의 저자가 인용한 미국의 군사 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과 일본의 방대한 문서를 연구한 붉은 군대의 만주 작전에 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저서 "The Soviet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1945"에서 그는 이러한 수정주의적 접근을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위험한 경향"이라고 평가했으며,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접근법은 서구 역사학계에 만연한 소련군에 대한 오만함과 진부한 역사적 무지함에 의한 것이다. 누가 옳은 것인가, 전봉관인가, 글랜츠인가?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 논평의 몇 가지 지점을 분석해 보자.
저자가 놓친 중대한 사실적 오류부터 시작해보자. 전봉관 교수는 소련과 미국, 영국의 지도자인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이 만난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결정이 '서둘러' 내려졌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소련의 참전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일본 함대가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기지를 공격한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소련 정부에 미국 편에 서 줄 것을 요청하면서였다. 그러나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소련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외교적 형식으로 이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모스크바 근교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었고, 붉은 군대는 독일 및 그 위성국의 대규모 지상 병력과 싸우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든 이유를 마땅히 이해하면서 다만 공개적으로는 불확실성을 유지하고 "일본에게 이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소련 국경에 가능한 한 많은 일본군을 붙잡아 두면서 그들이 미국 및 영국과의 전투에 언제든 투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 대통령의 요청에 충실하게 응했고, 소련-독일 전선의 상황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극동에 116만 명, 약 45.5개 규모로 추정되는 사단을 남겨둠으로써 4년의 전쟁 기간 내내 일본으로 하여금 태평양 전선의 주요 전투지와 멀리 떨어진 관동군에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야 스탈린은 1943년 11월 루스벨트 및 처칠과의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군의 끈질기고 거듭된 요청에 따라 나치 독일 패망 후 대일전에 합류하겠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영국의 총리는 1943년 11월 30일 이 결정을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1944년 여름, 베어마흐트(독일 국방군)에 일련의 전략적 패배를 입힌 후 소련 참모부는 일본에 대한 작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으며, 나치 독일과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에 이미 11개의 소총 사단을 서부 전선에서 극동으로 먼저 이동시킨다. 이때 참모총장 A.M.바실레프스키가 극동 소비에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944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처칠 영국 총리는 대일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소련 지도부에 공식적으로 질문했고, 이에 소련 측은 적절한 추정을 통해 연합국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면(일본 통신망 파괴 및 군수물자 공급) 독일을 무너뜨리고 2.5~3개월 내에 작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3국" 지도자 회의가 바로 소련을 항일 연합국에 포함시키기 위한 정치적 조건을 최종적으로 합의한 자리였던 것이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빼앗긴 영토의 반환과 몽골의 독립 인정 등과 같은 조건이 «염치라고는 모르는 사람의 요구사항»이라는 주장은 저자와 그가 인용하는 대영 제국 총리의 양심에 맡기도록 하겠다.
이 모든 사건을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글랜츠의 저서를 충분히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전봉관 교수가 이렇게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 연합군의 외교적 압력을 받으며 소련-독일 전선의 대치 상황이 가장 치열한 상황에서도 수년 전의 약속에 따라 오랫동안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소련이 마지막 순간에 오직 '이기심' 때문에 제국주의 일본과의 전쟁에 '서둘러' 참전했다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점은 민간인에 대한 붉은 군대의 "범죄"라는 허황된 이야기가 이미 오래 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소련군이 베를린에서 9만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는 등 유럽의 점령지에서 잔인하기로 유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지난해 «조선일보»에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칼럼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 돌렸다' 가 실린 바 있다). 이러한 완전한 거짓 비방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 검은 중상모략을 만들어 낸 사람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로, 그는 1945년 3월 2일 일기에 «…사실 우리는 소련군의 얼굴을 한 벌판의 쓰레기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이제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다»라고 썼다. 괴벨스의 보좌관 베르너 나우만 박사는 "러시아인에 대한, 그리고 베를린 사람들이 러시아인에게 겪게 될 일에 대한 우리의 선전 활동은 베를린 시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세뇌 덕분에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는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붉은 군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나치의 선전에 의해 퍼져 나간 거짓말은 냉전이 시작되는 분위기 속에서 동유럽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일반 시민들에게서도 인기가 있었던 소련군의 이미지를 최대한 깎아내리려는 서양 역사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선전용 비방의 주요 출처인 헬케 잔더와 바바라 요르의 책 «해방자와 해방된 자» («BeFreier und Befreite»)는 다음과 같이 사실을 교묘하게 조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 소아 병원의 자료를 사용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1945 년에 해당 병원에서 태어난 조사 대상 신생아 237 명 중 12 명과 1946 년에 태어난 20 명의 아버지가 러시아인이었다. 즉 병원에서는 32명의 러시아인 아이가 태어났고, 이는 전체 신생아의 5% 였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 아이들이 모두 성폭행에 의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등록부에 "혼외 출생"이라고 적힌 것이 그 근거이다). 뒤이어 같은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태어난 전체 출생아(23,124명)의 5%를 계산했더니 1946년 8월까지 러시아인 아버지를 둔 신생아가 1,156명이 된다는 결과가 바바라 요르에게 나오게 된 것이다. 뒤이어 "강간당한" 여성의 90%가 임신 중절을 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이 숫자에 10을 곱한다. 저자는 전체 피해자의 5 분의 1이 임신했다는 가정 하에 이 중간 결과에 5를 곱하여 57,800 명이라는 수를 얻은 다음 "8 세부터 80 세 까지의 모든 여성이 수없이 강간 당했다"는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공식을 약간 수정하여 생식 연령의 여성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와 노부인도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강간당한' 여성의 수가 9~10 만 명이라는 추정치에 도달한다. 즉, 조작과 노골적인 속임수를 통해 32 명의 러시아인 신생아가 9만 명의 "강간당한 독일인"으로 변한 것이다 (참고로 해당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 병원의 자료에 따르면 아버지가 미국, 영국 또는 프랑스인인 혼외 출생아 수는 13 명, 전체 출생아 중 2.2 %이며, 바바라 요르의 계산법을 적용하면 베를린에서 연합군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5만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의 선전당국은 자신의 추축국 동맹인 독일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러시아 야만인 무리가 민간인을 약탈 및 강간하고 있다"는 정보를 여기저기에 퍼뜨렸으며, 이 소식은 당연히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이후 미국 점령지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의 관리들이 계속 요직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던' 미군정이 이러한 선전 활동에 동참했다 (소련 점령지에서는 식민지 시대에 요직에 있던 자들이 지역 자치기관에 의해 즉시 경질됐다). 그러나 전봉관 교수 자신도 그가 인용한 소련군의 잔학 행위에 대한 "사실"이 소문에 근거하고 있으며 문서화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 보존된 문서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특히 소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미국 최고의 한국 근현대사학자 중 한 명인 B.커밍스는 1946년 한반도에 주재했던 미국의 학자 D.올름스테드의 연구를 인용하여 일반 국민들 사이에 소련군에 대해서는 온정이 느껴지는 반면 미군에 대한 태도에서는 "음울함과 소원함"이 관찰되었다고 지적했다. 커밍스는 그 이유가 명예롭지만은 않았던 미군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며 2002년 서울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권에서 그 사례들을 제시한다.
붉은 군대가 해방자가 아니라 자신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한반도에 왔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역사적 문서, 특히 스탈린과 안토노프가 서명한 1945 년 9 월 20 일 붉은 군대 총사령관 지령 1130 호를 들어 반박할 수 있는데, 지령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지시사항을 내리고 있다: "북한 영토에 소비에트 및 기타 소비에트 권력 기관을 설치하지 않고, 소비에트 체제를 도입하지 않고, 조선 점령 지역에서 항일 민주 조직과 정당의 형성을 막지 않고 그들의 일을 도우며, 군대는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고, 주민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며 올바르게 행동하고, 종교적 의식이나 예식을 방해하지 않고, 사원 및 기타 종교 시설을 건드리지 않는다".
또한 소련군의 희생(붉은 군대의 군인 691명이 조선을 해방시키다 전사했다)이 헛된 것이며, 전쟁의 승패는 원자폭탄에 의해 판가름 났다는 전봉관 교수의 주장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기록은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1945년 8월 9일 최고군사위원회 긴급 회의에서 일본의 총리였던 K.스즈키는 소련의 참전은 결국 일본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는다고 말했으며, 1945년 8월 17일 «육해 장병들에게» 내리는 일왕 히로히토의 칙어에서도 같은 문구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반복되었다: " 이제 소련도 우리와의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에 저항을 계속하는 것은 ... 우리 제국의 존립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참전은 마침내 일본이 전면적인 패배를 피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 역시 그와 같이 예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영토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싸운 것은 붉은 군대뿐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은 소련군뿐이라는 사실로 인해 러시아에 적대적인 이미지를 씌우기가 매우 불편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선일보»에 칼럼을 게재한 저자 전봉근과 주경철에게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역사에 대한 그러한 사이비 해석을 되풀이하는 것이 책임감 있고 진중한 학자로서의 명성을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가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기 바란다. (끝)
>>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에서 소련의 기여에 대한 추가 자료
2023년 7월 4일
[ 본 글 ]
《2023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 칼럼 «'8월의 폭풍' 그리고 소련군의 두 얼굴»에 관하여》
2023년 5월 27일 조선일보에는 1945년 8월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대일본전 승리에서 소련의 역할을 폄훼하기 위한 수많은 역사적 미신을 반복하는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의 칼럼 «'8월의 폭풍' 그리고 소련군의 두 얼굴»이 게재되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논평의 저자가 인용한 미국의 군사 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과 일본의 방대한 문서를 연구한 붉은 군대의 만주 작전에 대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저서 "The Soviet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1945"에서 그는 이러한 수정주의적 접근을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위험한 경향"이라고 평가했으며,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접근법은 서구 역사학계에 만연한 소련군에 대한 오만함과 진부한 역사적 무지함에 의한 것이다. 누가 옳은 것인가, 전봉관인가, 글랜츠인가?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 논평의 몇 가지 지점을 분석해 보자.
저자가 놓친 중대한 사실적 오류부터 시작해보자. 전봉관 교수는 소련과 미국, 영국의 지도자인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이 만난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결정이 '서둘러' 내려졌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소련의 참전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일본 함대가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 기지를 공격한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소련 정부에 미국 편에 서 줄 것을 요청하면서였다. 그러나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소련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외교적 형식으로 이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모스크바 근교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었고, 붉은 군대는 독일 및 그 위성국의 대규모 지상 병력과 싸우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든 이유를 마땅히 이해하면서 다만 공개적으로는 불확실성을 유지하고 "일본에게 이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소련 국경에 가능한 한 많은 일본군을 붙잡아 두면서 그들이 미국 및 영국과의 전투에 언제든 투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 대통령의 요청에 충실하게 응했고, 소련-독일 전선의 상황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극동에 116만 명, 약 45.5개 규모로 추정되는 사단을 남겨둠으로써 4년의 전쟁 기간 내내 일본으로 하여금 태평양 전선의 주요 전투지와 멀리 떨어진 관동군에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야 스탈린은 1943년 11월 루스벨트 및 처칠과의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군의 끈질기고 거듭된 요청에 따라 나치 독일 패망 후 대일전에 합류하겠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영국의 총리는 1943년 11월 30일 이 결정을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1944년 여름, 베어마흐트(독일 국방군)에 일련의 전략적 패배를 입힌 후 소련 참모부는 일본에 대한 작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으며, 나치 독일과의 전투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에 이미 11개의 소총 사단을 서부 전선에서 극동으로 먼저 이동시킨다. 이때 참모총장 A.M.바실레프스키가 극동 소비에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1944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처칠 영국 총리는 대일 군사 작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 소련 지도부에 공식적으로 질문했고, 이에 소련 측은 적절한 추정을 통해 연합국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면(일본 통신망 파괴 및 군수물자 공급) 독일을 무너뜨리고 2.5~3개월 내에 작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3국" 지도자 회의가 바로 소련을 항일 연합국에 포함시키기 위한 정치적 조건을 최종적으로 합의한 자리였던 것이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빼앗긴 영토의 반환과 몽골의 독립 인정 등과 같은 조건이 «염치라고는 모르는 사람의 요구사항»이라는 주장은 저자와 그가 인용하는 대영 제국 총리의 양심에 맡기도록 하겠다.
이 모든 사건을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글랜츠의 저서를 충분히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전봉관 교수가 이렇게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 연합군의 외교적 압력을 받으며 소련-독일 전선의 대치 상황이 가장 치열한 상황에서도 수년 전의 약속에 따라 오랫동안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소련이 마지막 순간에 오직 '이기심' 때문에 제국주의 일본과의 전쟁에 '서둘러' 참전했다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점은 민간인에 대한 붉은 군대의 "범죄"라는 허황된 이야기가 이미 오래 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소련군이 베를린에서 9만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는 등 유럽의 점령지에서 잔인하기로 유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지난해 «조선일보»에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의 칼럼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 돌렸다' 가 실린 바 있다). 이러한 완전한 거짓 비방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 검은 중상모략을 만들어 낸 사람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나치 독일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로, 그는 1945년 3월 2일 일기에 «…사실 우리는 소련군의 얼굴을 한 벌판의 쓰레기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맞서 우리는 이제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다»라고 썼다. 괴벨스의 보좌관 베르너 나우만 박사는 "러시아인에 대한, 그리고 베를린 사람들이 러시아인에게 겪게 될 일에 대한 우리의 선전 활동은 베를린 시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세뇌 덕분에 독일인들의 마음 속에는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붉은 군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나치의 선전에 의해 퍼져 나간 거짓말은 냉전이 시작되는 분위기 속에서 동유럽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일반 시민들에게서도 인기가 있었던 소련군의 이미지를 최대한 깎아내리려는 서양 역사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선전용 비방의 주요 출처인 헬케 잔더와 바바라 요르의 책 «해방자와 해방된 자» («BeFreier und Befreite»)는 다음과 같이 사실을 교묘하게 조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 소아 병원의 자료를 사용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1945 년에 해당 병원에서 태어난 조사 대상 신생아 237 명 중 12 명과 1946 년에 태어난 20 명의 아버지가 러시아인이었다. 즉 병원에서는 32명의 러시아인 아이가 태어났고, 이는 전체 신생아의 5% 였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 아이들이 모두 성폭행에 의해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등록부에 "혼외 출생"이라고 적힌 것이 그 근거이다). 뒤이어 같은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태어난 전체 출생아(23,124명)의 5%를 계산했더니 1946년 8월까지 러시아인 아버지를 둔 신생아가 1,156명이 된다는 결과가 바바라 요르에게 나오게 된 것이다. 뒤이어 "강간당한" 여성의 90%가 임신 중절을 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이 숫자에 10을 곱한다. 저자는 전체 피해자의 5 분의 1이 임신했다는 가정 하에 이 중간 결과에 5를 곱하여 57,800 명이라는 수를 얻은 다음 "8 세부터 80 세 까지의 모든 여성이 수없이 강간 당했다"는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공식을 약간 수정하여 생식 연령의 여성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와 노부인도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강간당한' 여성의 수가 9~10 만 명이라는 추정치에 도달한다. 즉, 조작과 노골적인 속임수를 통해 32 명의 러시아인 신생아가 9만 명의 "강간당한 독일인"으로 변한 것이다 (참고로 해당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 병원의 자료에 따르면 아버지가 미국, 영국 또는 프랑스인인 혼외 출생아 수는 13 명, 전체 출생아 중 2.2 %이며, 바바라 요르의 계산법을 적용하면 베를린에서 연합군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5만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의 선전당국은 자신의 추축국 동맹인 독일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러시아 야만인 무리가 민간인을 약탈 및 강간하고 있다"는 정보를 여기저기에 퍼뜨렸으며, 이 소식은 당연히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이후 미국 점령지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의 관리들이 계속 요직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던' 미군정이 이러한 선전 활동에 동참했다 (소련 점령지에서는 식민지 시대에 요직에 있던 자들이 지역 자치기관에 의해 즉시 경질됐다). 그러나 전봉관 교수 자신도 그가 인용한 소련군의 잔학 행위에 대한 "사실"이 소문에 근거하고 있으며 문서화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 보존된 문서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특히 소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미국 최고의 한국 근현대사학자 중 한 명인 B.커밍스는 1946년 한반도에 주재했던 미국의 학자 D.올름스테드의 연구를 인용하여 일반 국민들 사이에 소련군에 대해서는 온정이 느껴지는 반면 미군에 대한 태도에서는 "음울함과 소원함"이 관찰되었다고 지적했다. 커밍스는 그 이유가 명예롭지만은 않았던 미군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며 2002년 서울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권에서 그 사례들을 제시한다.
붉은 군대가 해방자가 아니라 자신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한반도에 왔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역사적 문서, 특히 스탈린과 안토노프가 서명한 1945 년 9 월 20 일 붉은 군대 총사령관 지령 1130 호를 들어 반박할 수 있는데, 지령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지시사항을 내리고 있다: "북한 영토에 소비에트 및 기타 소비에트 권력 기관을 설치하지 않고, 소비에트 체제를 도입하지 않고, 조선 점령 지역에서 항일 민주 조직과 정당의 형성을 막지 않고 그들의 일을 도우며, 군대는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고, 주민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며 올바르게 행동하고, 종교적 의식이나 예식을 방해하지 않고, 사원 및 기타 종교 시설을 건드리지 않는다".
또한 소련군의 희생(붉은 군대의 군인 691명이 조선을 해방시키다 전사했다)이 헛된 것이며, 전쟁의 승패는 원자폭탄에 의해 판가름 났다는 전봉관 교수의 주장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기록은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1945년 8월 9일 최고군사위원회 긴급 회의에서 일본의 총리였던 K.스즈키는 소련의 참전은 결국 일본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는다고 말했으며, 1945년 8월 17일 «육해 장병들에게» 내리는 일왕 히로히토의 칙어에서도 같은 문구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반복되었다: " 이제 소련도 우리와의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에 저항을 계속하는 것은 ... 우리 제국의 존립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참전은 마침내 일본이 전면적인 패배를 피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 역시 그와 같이 예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영토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싸운 것은 붉은 군대뿐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은 소련군뿐이라는 사실로 인해 러시아에 적대적인 이미지를 씌우기가 매우 불편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조선일보»에 칼럼을 게재한 저자 전봉근과 주경철에게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역사에 대한 그러한 사이비 해석을 되풀이하는 것이 책임감 있고 진중한 학자로서의 명성을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가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기 바란다. (끝)
>>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에서 소련의 기여에 대한 추가 자료